보물창고/나의사진방

사진으로떠나보는나의이집트여행

윤일란 2012. 1. 16. 00:14

 꼭한번쯤은가보고싶은 이집트여행....

그러나 아직 가보질못했으니 사진으로나마 여행을해보자.



기자의 거대한 피라미드(The Pyramid fo Giza)
왼쪽 ; 쿠푸왕 피라미드 / 가운데 ; 카프렌왕 피라미드 / 오른쪽 ; 멘카우리왕 피라미드
기자는 카이로시에서 서쪽으로 13Km 정도 떨어져 있다.
카이로시 변두리 사막과의 경계에 흘연히 웅대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기자의 3대 피라미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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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포토샵 제주도에서 찍은기억이...... 멋지다.



 할머니 아빠 엄마  여기 보고 웃으세요.... "김치"

내실력을 보여 줄태야....



 예쁘게 찍어주세요.... 고모에게 보여주게....

















  어깨동무새동무 로 언제나 사이좋게지내잖구나 짝꿍아........ " 그래"




 하나 둘 얍....우라챠차......... 우렁찬 내기압소리


 우리 같이하자 




 아~~~~ 피곤해 좀쉬자....ㅎ






  Amr Diab - Tamally Maak (언제나 그대 곁에)



카프렌왕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멘카우리왕 피라미드


여왕들의 세 피라미드(멘카우리왕 피라미드 옆에 위치한 작은 세 개의 피라미드)


사카라의 계단식 피라미드(이집트 최초의 피라미드) 




카르낙 신전 입구의 스핑크스(양의 머리를 한 스핑크스)


카르낙 신전 입구의 스핑크스(양의 머리를 한 스핑크스)


멤피스의 스핑크스 


멤피스 박물관의 람세스2세의 거대한 석상(길이 15m)


 

 

 



                         

1. 파라오들 이전의 상하 이집트


세계에서 제일 긴 강 나일(the Nile)은 적도 지방의 빅토리아 호수에서 발원하여 6,671km를 흘러 지중해로 들어간다. 강은 바다에 닿기 1,000km 쯤 전 아스완에 있는 '나일의 제 1폭포'를 통과하는데, 이집트 역사는 대략 나일의 이 마지막 1,000km 구간, 즉 나일의 제 1폭포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유역에서 지난 6,000년 동안 일어난 일이다.


12,000~10,000년 전 쯤인 구석기 시대 말기부터 기상 변화가 계속되어 원래 드넓은 숲이었던 북부 아프리카 지역이 점차 사막으로 변해갔다. 사람들은 나일강 유역에 모여 살게 되었으나 해마다 강물이 범람하는 이곳도 처음부터 사람이 편히 살 수 있는 풍요한 땅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범람으로 비옥해진 땅에 농사를 지으면서 범람에 대처하는 토목과 관개 기술을 개발해 내고 도시를 건설하고 또 신화를 창조해 내면서, 후세의 사람들이 '고대 이집트 문명'이라고 부르게 되는 위대한 문명의 기초를 놓은 것이다.
지금부터 6,000년 전 쯤이 되자 이집트는 주민의 생업과 정치, 종교, 문화적 정서가 서로 다른 두 지역처럼 되었으니 나일 삼각주의 하(下) 이집트와 상류 지방인 상(上) 이집트가 그것이다. 상 이집트는 사막화가 진행되면서 이용할 만한 토지가 점차 줄어들고 생산성도 떨어져 가는 나일강변의 좁고 긴 지역이고, 하 이집트는 오늘날 카이로 북부에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 있는 인구가 밀집된 풍요로운 땅으로, 다른 이민족들의 교역과 교류가 육지와 바다를 통해 활발이 이루어지던 지역이었다.

초기 왕조 시대(기원전 3000~2780년경)


1,000여년에 걸쳐 끊임없이 적대하고 경쟁하던 상, 하 이집트는 기원전 3000년 무렵 상 이집트의 나르메르라는 왕에 의해 최초로 통일되고 수도는 상, 하 이집트의 중간 지점인 멤피스에 건설되었다. 이집트 민족의 통합과 이집트 문명의 비약적 발전의 계기가 되었고, 이집트 고대사의 시발점이 된 나르메르의 통일은 히에라콘폴리스에서 출토된 나르메르 팔레트'라는 점토판에, 호루스 밑에 꿇어 앉아 있는 하 이집트 왕이 나르메르왕에게 항복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일이 있고 2,700년쯤 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332~30년)의 신관(神官) 마네토는 고대 이집트의 역사를 파라오(군주, 왕)들의 계보에 따라 모두 31개 왕조로 나누어 서술하였는데, 마네토의 서술은 그가 메네스라는 이름으로 부른 나르메르의 상, 하 이집트 통일에서 시작하여 이집트 출신의 마지막 파라오, 넥타네보 2세의 죽음(기원전 343년)으로 끝을 맺는다. 고대 이집트 역사 서술에 사용되는 제 몇 왕조라는 명칭은 마네토의 이 서술 체계를 활용한 것이며, 초기왕조시대는 마네토의 제 1, 제 2 왕조에 해당된다.


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 통일로 가능해졌다. 통일 이집트의 초대 군주 나르메르의 재위 중 멤피스에서 나일강의 흐름을 바꾸는 공사가 있었는가 하면, 그의 후계잦인 아하, 3대 군주 제르 시대에는 이집트 인들은 누비아로, 시나이로 원정을 한다.
제 1 왕조가 발전의 절정을 이룬때는 5대 군주 덴의 시대였다. 덴 왕은 제국의 행정 제도를 완비하고 상 이집트의 군주임을 상징하는 흰색 왕관과 하 이집트의 군주임을 상징하는 붉은 왕관을 결합시킨 이중 왕관을 최초로 착용하였고, 영토 확장과 국가 기반의 확립, 국민적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제 2왕조의 초대 군주의 칭호 헤텝세켐위('두 세력이 평화스러운'이라는 뜻)는 상, 하 이집트 사이에 분쟁이 끝난 것을 상징하는 듯하다.)


제 1, 제 2왕조 시대에 이집트는 정부 조직과 행정 체계, 건축과 토목 기술, 예술 등 모든 면에서 큰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집트 인들의 문자 체계인 히에로글리프도 정비되었고, 1년을 365일로 하는 역법이 완성되었다.

고왕국 시대(기원전 2780~2270년경)와 제 1 중간기(기원전 2263~2040년)


고왕국시대는 마네토의 제 3~6왕조에 해당된다. 제 2왕조의 2대 군주 조세르는 이집트 왕들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역사상 최초로 피라미드를 건설한 군주로도 유명하다. 조세르 치하의 재상이며, 제사장이고, 의사이며, 사상가이자 건축가인 임호텝이 조세르의 무덤으로 고안해 사카라에 건설한 '계단식 피라미드'는 세계 최초의 대규모 석조 건축물로서 파라오의 절대 권력과 조직화된 국력을 짐작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임호텝은 훗날 '치료의 신'으루 추앙받으며 의자에 앉아 있는 서기관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피라미드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은 제 4왕조(기원전 2723~2563년)에서 나타난다. 제 4왕조의 초대 왕은 스네프루였는데, 그의 후계자 쿠푸가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대(大)피라미드를 기자 지방에 세운 것이다. 평균 2,300kg짜리 돌 2백 30만개가 들어간 이 공사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건축 기술, 측량과 설계의 정확함, 국가 동원 체제, 기획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쿠푸의 아들 카프라가 세운 피라미드도 아버지의 것 못지 않으나 그는 '계곡 신전'에 있는 스핑크스로 더 유명하다. 왕릉 단지의 수호신으로 여겨지는 스핑크스의 얼굴은 카프라의 것이라고 한다.
멘카우라의 피라미드도 똑같이 유명하다. 이 두 피라미드는 대 피라미드보다 약간 작은 크기로 그 옆에 서있다. 제 4왕조는 고대 이집트 왕국이 정점에 도달한 시기였으며, 사람인 동시에 신(神)이기도 했던 왕과 그의 왕권이 문자 그대로 절대적이었던 시기였다.


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의 아들 우세르카프가 세운 제 5왕조(기원전 2563~2423년)에서는 태양신 숭배가 절정에 이른다. 오시리스 신을 대신하여 태양신 라가 최고신이 되었고, 군주들은 태양신의 아들임을 자처했으며, 태양신을 위한 신전이 건축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집트 신화에서 태양신 라는 때로는 오시리스 신과 동일시되기도 하며, 때로는 호루스 신과 합성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태양신 라의 가장 대표적인 모습은 호루스 신과 같이 매의 얼굴을 한 사람이 머리에 태양을 얹고 있는 형상이며, 태양은 뱀이 둥글게 한번 몸을 튼 모습으로 표현된다. 제 5왕조 군주들의 피라미드 벽화에는 이집트 인들이 시리아, 누비아 등지에서 벌인 원정 사업이 그려져 있으며, 이러한 업적은 '팔레르모 스톤(Palermo Stone)' 같은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제 5왕조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군주의 절대 권력은 제 6왕조(기원전 2423~2263년)때 완전히 약화되고, 이후 이집트 인들은 폭력과 내전으로 점철되고 비관과 혼란이 가득한 제 7~10왕조의 제 1중간기를 겪게 된다

중왕국시대(기원전 2133~1785년)와 제 2 중간기(기원전 1785~1575년)


마네토의 제 11왕조(기원전 2133~1991년)와 제 12왕조(기원전 1991~1785년)에 해당되는 중왕국시대는 테베의 왕자 멘투호텝 2세가 오랜 고난과 투쟁 끝에 이룩한 상, 하 이집트의 재통이로 시작된다. 그는 호루스의 새로운 이름인 스마토위('두 땅을 통일하는 자'라는 뜻)를 자신의 칭호로 택했다. 통일은 모든 계층의 이집트인들에게 향상된 삶을 가져다 주었으며, 절대 다수의 이집트인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멘투호텝 2세는 통일 후 바로 누비아, 리비아, 시리아, 시나이 원정에 나서 성공을 거두었고, 그의 뒤를 이은 멘투호텝 3세는 누비아 지역에 대한 직접 지배를 위해 콥토스에서 와디 함마마트를 거쳐 홍해로 이르는 길을 재개척했다.
상 이집트 총독으로서 이러한 원정 사업의 책임자였던 재상 아네네메트가 제 12왕조를 연다.


이 왕조시대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찬란한 시기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아메넴메트는 아문을 수호신으로 하는 테베 출신이었으나 이집트 전역을 보다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멤피스 남쪽에 새로운 도시 이트즈-토위('두 땅을 쥔'이라는 뜻)를 건설하고 천도했다. 그리고 근처에 자신의 피라미드를 건설했다. 누비아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나일의 제 2폭포'지역에 요새를 건설했으며, 아시아 인들의 델타 지역 침입을 막기 위해 와디 툼밀라트에 '통치자의 성'이라는 요새를 세웠다. 그의 후계자들도 신석기시대 농경 문화의 발상지인 파이윰 지방을 재확보하는 등 이집트 번영에 박차를 가했다.


이집트 역사의 황금기라고 하는 세소스트리스 3세와 아메네메트 3세의 재위 기간은 평화와 안정의 시기였으며, 신인 동시에 인간이었던 군주들이 인간 쪽에 더 가까워진 시기였다. 제 12왕조 초기부터 번영하는 이집트는 외국인들, 주로 아시아 인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으며, 통상과 외교의 확대로 이집트에 외래 문화와 사상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세소스트리스 3세와 아메네메트 3세의 황금기에 이어 아메네메트 4세와 세벤크네프루 여왕 통치기에도 아시아 인들이 기회의 나라 이집트로 몰려와 자신들의 재능을 발휘하여 이집트 문화와 사회 발전에 기여하면서 자신들의 입지와 세력을 강화했다.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제 12왕조 말부터 점차 국가의 통제권이 약화되고, 나라가 분열되면서 여러 대 전부터 이집트 땅에 들어와 정착한 아시아 족 외국인들이 제 16왕조와 제 17왕조 시기에는 이집트를 지배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들을 힉소스(이민족 통치자들)이라고 부른다. 아시아 인들의 지배는 이집트에 새로운 문물이 유입되는 전기가 되었다. 새로운 악기와 음악 양식, 청동 세공술에서 도자기 제조, 베짜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술 혁신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품종의 동물과 곡식이 도입된다. 전쟁에는 새로운 유형의 무기와 아울러 전차와 말이 등장하였다. 제 13왕조 때부터 힉소스 지배가 끝날 때까지의 혼돈기가 제 2중간기(기원전 1785~1575년)이다.

신왕국시대(기원전 1575~1085년)와 제 3 중간기(기원전 1085~664년)


제 18왕조(기원전 1575~1308년)는 이민족 힉소스의 지배를 벗어 던지기 위해 여러 대에 걸쳐 투쟁하던 테베의 왕가 출신 아흐모세가 열었다. 아흐모세는 가문의 전통에 따라 '아문 신의 아내'라는 칭호를 가진 친누이 노프레타리와 결호하였는데 이러한 친오누이간의 결혼은 신과 여신의 결혼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중왕국시대부터 상실되기 시작한 왕의 신성성을 회복하려는 고도의 정치 행위였다. 아흐모세는 힉소스의 세력을 델타 지역에서 소탕하고 상. 하 이집트를 재통일하였으며, 이집트의 옛 영토를 회복했다.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아멘호텝 1세는 이집트 국경을 남쪽의 제 3폭포까지 확대했다.


제 18왕조의 4대 군주 투트모세 2세의 정처 핫쳅수트는 그녀의 남편이 후궁에게서 낳은 투트모세 3세가 겨우 열 살의 나이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섭정을 하다가 나중에는 스스로 왕이 되었따. 그녀는 회화나 조각에서는 남자의 복장을 하고 수염을 단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잇으나, 문헌에서는 그녀를 가리키는데 여성형 인칭 대명사가 사용되고 있다. 그녀의 집권 기간중 이집트는 대체로 평화로웠으나 통치 영역이 크게 축소되었다. 그녀가 죽은 뒤 투트모세 3세는 스스로 이끈 여러 차례의 원정전에서 승리하면서 이집트의 옛 땅을 수복하고 아시아 지역을 편입하여 '나일의 제 4폭포'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러한 이집트의 정치 세력은 아멘호텝 3세 시대에 절정에 달했다. 그는 황금의 호루스, 진리의 통치자, 상, 하 이집트의 왕, 라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불렸다. 아멘호텝 4세는 이집트의 모든 왕들 중 가장 논쟁의 대상이 되는 인물일 것이다. 그는 테베의 수호신 아문을 버리고 역사상 최초로 유일신교의 신 개념을 확립한 종교 개혁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왕위에 오른지 5년 되는 해에 자신의 이름을 태양신의 숭배를 뜻하는 아케나텐('아텐에게 봉사하는'이란 뜻)으로 바꾸고, 태양신의 구체적인 형상인 아텐(태양판)을 유일한 존재로 숭바하고, 아텐에게 바치는 수많은 신전을 지었다. 그는 수도를 중부 이집트의 알아마르나로 옮기고 신도시 아케타텐(아텐의 지평선)을 건설하였다.


신왕국시대에 누렸던 영화는 1922년 발굴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왕들의 골짜기'에서 출토된 화려한 부장품들, 그중에서도 파라오 시신의 얼굴 덮개인 투탄카문 왕의 황금 가면'등으로 잘 확인된다. 9살에 왕위를 계승한 소년왕 투탄카문은 즉위 3년째 되는 해에 도읍을 옮기고, 아텐 숭배를 버렸으며, 이름도 투탄카문으로 바꾸었다. 그 뒤 왕권은 아이, 호렘헵을 거쳐 재상이자 장군이었던 람세스의 가문으로 넘어간다.


제 19왕조(기원전 1308~1186년)는 람세스 1세부터 시작한다. 그의 뒤를 이은 세티 1세는 훌륭한 군사 지도자로 아시아의 지배자가 된 히타이트 왕국을 무력으로 압도하였고, 나일 삼각주로 들어오려는 리비아 인들에게 효과적으로 대처하였다. 3대 군주 람세스 2세는 66년 간이나 이집트를 다스린 위대한 왕이다. 평화 조약과 혼인 동맹을 맺는등 히타이트족과의 오랜 적대 관계를 청산하는데 성공하였다. 성경의 출애급기에 나오는 압제자 파라오가 람세스 2세이다. 뒤를 이은 그의 13째 아들 메르네프타는 유대 민족이 이집트에서 대탈출(출애급)할 당시의 군주로 추정되고 있다. 메르네프타의 전승 기념비에 있는 '이스라엘은 황량하며, 씨 뿌릴 땅이 없다.'는 대목은 이스라엘을 언급한 가장 오래된 문헌 자료이다.


제 20왕조(기원전 1186~1085년)의 오랜 평화 시대가 가고, 왕권이 몰락하고 사제들이 정치를 농단하고 외세의 침입을 받는 제 21~25왕조(기원전 1009~664년)가 이어진다. 제 3중간기라고 불리는 이 혼돈과 좌절의 시기에는 리비아계 군주들이 통치하고, 누비아 인들이 상 이집트 전역과 중 이집트의 멤피스까지 약탈하며, 이디오피아 군주들과 앗시리아 인들의 지배를 받게 된다.

후기왕조시대(기원전 663~332년)


후기왕조시대는 이집트를 지배하던 앗시리아 인들을 무찌른 하 이집트 델타 지역 사이스의 왕자 프삽티크 1세의 제 26왕조(기원전 663~525년)로부터 시작된다. 이 왕조와 더불어 예술이 부흥하였으며, 특히 조각은 사실주의의 완성의 경지에 도달했다. 2대 군주 네코의 시대에는 상업이 발달하고 해군력이 증강되었으며, 나일 강과 홍해 사이에 운하가 건설되었고, 특히 이집트와 그리스 사이에 교역이 발달하여 많은 그리스 인들이 상인으로서, 왕가의 용병으로서 이집트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제 27왕조(기원전 525~404년) 시대에 페르시아의 군주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총독을 두어 다스렸으나, 이집트 인들은 복종하지 않았다. 외세의 강점에도 불구하고 건축과 조각과 문학이 흥성했으며,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이집트를 방문한 것도 이 시기였다. 페르시아 군주들의 암살, 사망, 아테네와의 마라톤 전투에서의 패전등을 계기로 델타 지역에서 끊임없이 반 페르시아 봉기가 일어났고, 그 때마다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닫. 제 28왕조(기원전 404~399년)를 연 사이스 출신 아미르타에우스에 의해 반 페르시아 투쟁은 드디어 승리를 거두고, 제 29왕조(기원전 399~378년)시대에는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세력 균형에 힘입어 이집트가 다시 국제 무대의 일원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제 30왕조(기원전 378~341년)에서는 줄곧 번영을 누릴 수 있었으나 제 30왕조의 마지막 군주 넥타네보가 페르시아 군의 침입을 저지하는데 실패하고 누비아로 도망함으로써 이집트 인에 의한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고 페르시아 군주들의 제 31왕조(기원전 341~332년)가 들어섰다.

그리스-로마 치하의 이집트


① 마케도니아의 이집트 점령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기원전 332~30년)
기원전 332년 가을 알렉산더 대제의 마케도니아-그리스 군이 이집트로 진군하자 이집트 인들은 그들을 해방자로 환영했다. 그는 그리스까지 이름이 나 있던 리비아 사막에 있는 시와 오아시스의 아문 신전을 방문하여 그가 아문 신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아냈는데, 이를 계기로 이집트 인들은 그를 새로운 파라오로 인정했다. 알렉산더는 나일 삼각주 서편에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였고, 지중헤에 면한 이 항구 도시는 이집트 최대의 도시로 발전한다.


이집트 통치를 마케도니아, 그리스, 이집트인 행정관들에게 나누어 맡기고 떠난 알렉산더가 기원전 323년에 바빌론에서 사망하자 이집트는 우여곡절을 거쳐 마케도니아의 귀족 출신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수중에 들어갔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이집트 왕실의 전통을 따라 친누이와 결혼했으며 이런 관행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전통이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는 초기 160년 동안이었다.


그 후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에 권력 투쟁이 빈발하였고, 전성기 때 영토의 낳은 부분을 상실하게 되어, 마지막 100년은 로마의 보호 없이는 독립도 유지할 수 없을 만큼 약화되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의 후손들은 기원전 30년, 안토니우스와 연대하여 옥타비아누스와 대결하려 했던 클레오파트라 7세가 악티움에서 패전하고, 알렉산드리아가 함락당하여 자살할 때까지 300년 이상 이집트를 다스렸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세계의 중심이있고, 학문과 예술의 수준이 세계 최고인 도시였다.

로마(기원전 30년~기원후 395년)와 비잔틴 제국의 지배(395~641년)


야심차고 보기 드물게 유능했던 클레오파트라 7세의 자살로 고대 이집트 시대는 막을 내리고 이제 이집트는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로마 황제들은 이집트의 전통을 존중하였고, 이시스 숭배를 비롯한 이집트 문화의 영향이 로마까지 파급되었다.


한편 기독교가 이집트로 전파된다. 기독교는 발생 초기 박해를 받았으나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보호 속에 급격히 발전한다. 특히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이집트의 모든 '우상 신전'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린 바 있다. 이집트는 그리스 어를 사용하는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비잔틴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자 이집트에서의 토착종교는 거점을 점점 잃어갔다. 기독교 수도자와 은둔자들이 급격히 늘어나 세계 최초로 이집트에 수도원이 등장하였다. 성서, 성자들과 순교자들의 삶에 대한 번역물이 주를 이루는 풍부한 콥트 문학이 이집트에서 발전한다.

이슬람화, 아랍화한 이집트(641~1997년)


서기 610년 아라비아에서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유일신 알라의 계시를 받고 이슬람 공동체 움마를 건설한다. 새로 발흥한 이 아랍-이슬람국의 제 2대 칼리파 오마르 때에 이집트로의 이슬람 팽창이 이루어진다. 서기 639년, 아므르 빈 알-아스가 이끄는 아랍군이 침입하자 비잔틴 군대의 저항은 오래 가지 못하였고, 이집트 전역은 아랍-이슬람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 후 750년까지 이집트는 메디나의 이슬람 정통 칼리파 시대(632~661년)와 다마스커스의 우마이야 조(661~750년)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으며, 그 뒤에는 이라크 압바스 조(750~1256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압바스 조 후기,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이집트에는 툴룬 조(868~905년), 이크쉬드 조(905~969년), 파티미 조(969~1171년), 아이유브 조(1171~1250년)가 차례로 일어난다. 특히 파티미조는 크게 강성하여 북 아프리카를 통일하고, 시리아까지 세력을 떨쳤으며, 오늘날의 카이로(알 까히라)가 이때 새로 건설되었다. 1250년, 압바스 조가 몽골의 훌라구에 의해 무너지기(1256년) 바로 전 십자군의 영웅 살라딘이 세운 아이유브 조는 막을 내리고, 이집트에는 비 아랍 군노(軍奴)들인 맘루크들의 맘루크 조(1250~1517년)가 들어선다. 아 맘루크 조는 오스만 터키 제국의 살림 1세의 손에 멸망당할 때까지 이집트를 통치한다. 그 뒤 이집트는 근세까지 오스만 터키 제국의 속주로 전락해 있었다.


1798년 이집트는 나폴레옹 1세에게 침략을 당하였고 그 뒤, 오스만 터키 제국을 종주국으로 하는 알바니아 출신 무함마드 알리의 후예들의 지배(1805~1952년)하에 들어간다. 그러나 1822년에는 다시 영국에 점령을 당하고, 1914년에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가 1922년이 되어서야 명목에 불과한 독립을 얻어 입헌군주국이 된다. 후아드 1세는 왕이 되지만 실질적으로는 영국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1952년 자유장교단의 쿠데타로 군주제가 타도되고 가말 압둔 낫세르는 1956년 2,000년 만에 다시 이집트 인의 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는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고, 아스완 하이 댐을 건설하였으며, 잠시나마 시리아와 통일 아랍 연맹을 수립하기도 하였다. 이집트는 1956년, 1967년 대 이스라엘 전쟁에서 패해 시나이 반도를 잃었다. 그 후 사다트 정보는 1973년 전쟁 후 중동 평화 회담을 통하여 이를 되찾는다. 현재 후스니 무바라크가 사다크의 평화 주도 정책을 이어 받아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와는 1961년 12월 영사 관계를 수립하였고 1995년 국교를 수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