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코르토 (Alfred Cortot 1877 ~1962)
1. Curriculum Vitae
분명히, 20세기 초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다양한 스타일의 피아노 연주들이 존재했다. 굳이 호로비츠의 '요즘 연주들은 한결같이 똑같이 들린다'는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정확하고 순수한 스타일의 박하우스, 기제킹, 리파티에서 극도로 주관적인 파데레프스키나, 중간 정도인 요제프 호프만이나 호로비츠 등까지 여러 예를 들 수 있다. 아직까지 쇼팽 녹음의 필수 수집 품목으로 불리는 고전적인 명연을 남긴 코르토는 당연히 주관파로 분류해야 할 것이다.
알프레드 코르토는 프랑스인을 양친으로 하여 스위스 니용(Nyon)에서 태어났다. 파리 음악원에서 공부했고, 선생은 리스트의 제자였던 루이 디에메(Louis Diémer)였다. 디에메의 또 하나의 유명한 제자는 다음 세대의 로베르 카자드쥐인데, 같은 스승에게 배운 두 사람의 스타일 차이를 생각하면 매우 재미있다. 그의 재능은 곧 주목받았으며, 10대 때 파리를 방문한 안톤 루빈슈타인(Anton Rubinstein) 앞에서 '열정' 소나타를 연주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코르토에게 '연주만 하지 말고 재창조(reinvent) 해라'고 말했다는데, 이 충고를 코르토가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 모르지만 그는 앞으로 연주가의 주관을 중요시하는 길을 밟는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엘리트들을 휩쓴 바그너 열풍은 코르토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1901년 바이로이트로 가서 한스 리히터(Hans Richter)의 보조 지휘자가 되어 지휘를 배웠고, 귀국 후 파리에서 '신들의 황혼'의 프랑스 초연을 지휘했다. 그는 후에 베토벤 '장엄 미사'와 브람스 '독일 레퀴엠'의 프랑스 초연도 지휘했다. 카잘스는 코르토가 가장 아끼는 것은 르노와르가 그린 바그너의 초상이었다고 말할 정도다.
그는 단지 피아노 뿐 아니라 지휘나 저술, 교사 활동까지 음악의 다방면에서 매우 활동적이었으며, 이 면에서는 알렉산더 슈나이더조차도 따를 수 없을 것이다. 티보 및 카잘스와 1906년부터 시작한 유명한 트리오 활동과, 파리 음악원 당국과 충돌하여 1919년 직접 세운 에콜 노르말 드 뮈지크(École Normale de Musique; 아직 유명하다)에서 펼친 교육 활동은 잊을 수 없으며, 그의 제자 중에는 리파티, 마그다 탈리아페로(Magda Tagliaferro), 프랑스와, 하스킬 등이 있다. 그가 한 피아노 공개 강연은 한 번에 신청자가 800명이나 됐다고 한다. 이 외에 일상적인 연주 활동과 다양한 저술 활동이나 콩쿠르 심사위원 등을 합하면, 아마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랐을 것이다. 카잘스는 그를 '자신의 일에 대해 고도로 치밀하고, 무엇보다도 야망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말했는데, 티보처럼 '연습하기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기대하기 어려웠으리라.
카잘스는 그 말 뒤에 '아마 이 야망 때문에 후에 그가 처한 슬픈 사태가 벌어졌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불행히도 코르토는 나치가 1940년 파리를 점령했을 때 공개적으로 협력했고, 물론 나치 점령 지역과 독일에서 연주했다. 이 때문에 1944년 자유 프랑스가 회복되자 프랑스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스위스 로잔(Lausanne)으로 이주했고, 여기를 중심으로 다시 활동했으나 이미 전성기는 지나 있었다. 그래도 유럽 및 일본 등지로 연주 여행했고, 관계를 회복한 카잘스의 요청으로 1958년 프라드 음악제에서 카잘스와 듀오로 연주했으며, 1950년대부터는 다시 프랑스에서도 간헐적으로 연주했고 녹음도 했다. 프랑스에서 다시 활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카잘스의 회상처럼 그가 자신의 과거를 부끄러워하고 공개적으로 이 전력에 대해 사과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는 1962년 로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2. His art & recordings
카잘스는 코르토에 대해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 시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며, 무한한 약동감과 놀랄 만한 힘을 가졌다'고 말했다. 뒷 문장에는 나도 동의하는데, 그의 음악은 전체적으로 어딘가 돌진하는 힘, 격한 감정의 기복, 놀랄 만큼 개성적인 곡의 파악 등을 느끼게 한다. 그 외에, 빠뜨릴 수 없는 점은 당시의 피아노 거장답게 피아노 음색이 매우 풍부하고 아름다우며, 수시로 음색이 변화한다는 점이다. 외면적으로는 강렬한 루바토의 사용을 빼놓을 수 없다. 어느 일본 평론가는 코르토의 실황을 듣고 '루바토와 색채의 예술'이라고 평했는데, 다소 단순화한 느낌이 있지만 그의 일면임에는 틀림없다.
그의 음악은 비슷한 세대인 에트빈 피셔를 생각나게 하는 점이 있는데, 기교적으로는 아주 완벽하지는 않고, 음색이 매우 개성적이며 풍부하다는 점이 그렇다. 코르토의 베토벤 소나타는 프랑스 파테(Pathé)에 녹음이 있으나 발매되지 않아서 들어 볼 수는 없지만, 피셔와 코르토 두 사람은 모두 바흐의 쳄발로 협주곡 5번 f단조의 2악장을 녹음했다. 둘 다 음색은 정말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다. 지금 시각에서는 두 사람 모두 물론 로맨틱하지만, 어느 편이 더한지는 확연하다. HMV에서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쇼팽은 코르토에게 맡겼으나 모차르트는 피셔가 맡았던 것이다.
지금 남은 그의 음반들은 거의 모두 HMV(지금의 EMI)에서 1920~50년대 초에 녹음했는데, 그는 사실 당시의 피아니스트 중에는 녹음이 상당히 많았고 지금까지 그 중 대부분이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EMI 본사 외에, Music & Arts, Biddulph, Pearl, 최근의 Naxos까지 진지하게 78회전 시대의 음반을 내놓는 회사들은 모두 그의 음반을 내놓았다.
그의 쇼팽은 좀 자세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1933~4년의 전주곡은 명연으로 이름이 높은데, 2~4번을 철저히 검토해 보자. 2번에서는 묘하게 흔들리는 루바토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는, 왼손이 규칙적으로 진행하나 오른손은 보통 약간 늦는다) 그리고 끝의 강조된 V7 화음은 감상자의 의표를 찌른다. 3번은 왼손이 매우 까다로운데, 코르토는 왼손이 아주 매끈하지는 않으나, 강약 표현은 매우 자유롭다. 4번은 2번보다 루바토가 더 선명하다. 그리고 가끔 부풀어오르는 솜씨는 정말로 처절하며, 끝 세 화음의 처리도 대단히 독특하다. 요즘의 감각에서 보면 루바토를 좀 남용하는 경향이 있지만, 음악은 개성이 넘친다. 14번이나 24번에서는 박력과 긴장감이 넘쳐서 자기도 모르게 손에 땀이 난다. 한 마디로, 곡 전체에 뭐라 말할 수 없는 긴장과 정열이 감돌고 있다. 1933년의 뱃노래도 자유로운 연주인데, 후반의 강렬한 고조는(빠른 템포 때문에 미스 터치가 많긴 하지만) 이 곡이 살롱 음악이라는 생각을 완전히 뒤엎는 데 충분하다. 질주하는 환상곡이나 발라드도 처절한 정열이 넘치며, 연습곡은 기교 문제가 좀 두드러진 점이 문제지만 너무나 자신 있는 파악에 끌려들어간다.
쇼팽이 그의 남은 음반 중 가장 중요하지만, 슈만과 기타 작곡가들의 녹음도 소중하다. 슈만은 협주곡, 3중주곡 1번과 함께 상당량의 독주곡, 바리론 샤를르 팡제라(Charles Panzéra)와 '시인의 사랑'을 남겼는데, 그의 낭만주의가 가장 잘 어울리는 작곡가가 쇼팽과 슈만일 것이다. 교향적 연습곡의 파악이 마음에 가장 들지만, 카르나발이나 다소 비통하기까지 한 '시인의 사랑'도 특필할 만 하다. 피셔-디스카우와 데무스의 스마트하고 깔끔하게 연마된 연주(DG)에 비하면 상당히 감상적(感傷的)이긴 하지만.
의외로 프랑스 작품 중 다소 그의 성향과 약간 어긋나는 레파토리도 보이는 점이 재미있다. 프랑크는 '교향적 변주곡'이 훌륭하고, 전주곡,코랄과 푸가의 개성도 좋지만, 무엇보다 티보와 연주한 소나타(1929 녹음)가 압권이다. 인상파 작품들은 의외로 드뷔시보다 라벨이 인상이 더 좋다. 전주곡 1집은 그의 낭만적인 접근이 다소 이질감이 드는데, 카자드쥐와 리히테르 등의 절제된 스타일을 좋아하는 내 취향에서는 다소 지나치다. 라벨은 작곡가의 고전적인 취향을 의식했는지 훨씬 상식적이며, 그 속에 간혹 나타나는 코르토의 장점이 매력적이다. 왼손을 위한 협주곡도 물론 좋으며, 생상 협주곡 4번도 있다.
다른 작곡가들은 바흐에서 알베니스까지 다양하다.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2번 3악장 주제의 끝 무렵에서 난데없는 쉼표가 나오는데, 사실 처음 듣는 사람에게는 상당히 황당하다. (나도 코르토의 의도가 뭔지 모르겠다) 이 녹음을 얼마 전에 나온 EMI 레페랑스 시리즈 2장으로 구한다면, 여백에 앞에서 말한 쳄발로 협주곡 5번 2악장과 비발디 '조화의 영감' op.3-11 d단조를 바흐가 오르간 용으로 편곡한 것을 다시 코르토가 피아노 용으로 편곡해 놓은 녹음이 들어 있다. 특히 후자는 정말로 압권이다. 좀 듣기 드문 레파토리인 베버 소나타 2번이나, 녹음은 많이 낡았지만 '무도회를 권유함'도 재미있다. 역시 녹음은 낡았지만 리스트도 격렬한 정열이 돋보인다. 박진감 있는 1929년의 소나타 b단조도 좋지만, 개인적으로 1935년의 전설곡 2번 '물 위를 걷는 성 프랜시스'의 훌륭한 묘사력을 추천하고 싶다.
어느 일본 평론가는, 자신이 코르토의 실제 연주를 보고 어디엔가 홀린 듯한 기분이 되었다고 한다. 루바토와 적절한 몸짓의 사용으로 템포를 착각하게 만들기도 하는 등, 관객의 심리를 아주 잘 파악하고 있는 연주가였다고 한다. 이를 보면, 코르토는 본질적으로 무대형 연주가이지 레코드형 연주가가 아니었나 보다. 그런 그를 이렇게 많이 녹음하게 한 장본인은 HMV의 전설적인 프로듀서 프레드 가이스버그(Fred Gaisberg) 였다고 한다. 관객이 없는 인공적인 환경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을 코르토를 이 정도로 녹음을 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에게 감사를 표해야 하지 않을까.
코르트의 음악 양식을 현대에서 실제 연주로 듣기는 불가능하다. 이는 푸르트뱅글러나 마찬가진데, 이들의 음악이 19세기 말의 양식을 반영하며 지금은 그 시대가 지나갔기 대문이다. 악보를 엄격하게 다루는 요즘, 옛날의 해석의 자유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이들의 연주가 지금까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개성적이면서도 악보에 대한 철저한 연구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푸르트뱅글러는 아무리 자주 연주했던 곡이라도 다시 꼭꼭 악보를 재검토하고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질릴 정도로 연습을 시켰다. 코르토는 제자들에게 어떤 곡을 과제로 줄 경우, 작곡자의 작곡 당시 배경에 대해 리포트를 써 오도록 요구했으며, 자신이 편집한 쇼팽의 살라베르 판(Salabert Edition)에는 매우 상세한 지시를 붙였다고 한다. 만년에 아꼈던 제자며, 독주 레파토리를 지도받았던 토마스 맨샤트(Thomas Manshardt)의 회상에 의하면, 그는 말로 명확히 지시하기를 꺼렸지만, 슬러나 강약들 하나하나를 철저히 연구했고, 제자들에게 그것을 기반으로 가르쳤다. 이런 근면함이야말로 이들의 음악을 수십 년 후까지 생명력을 유지시킨 원동력이라고 봐야 한다. 그들이 살았던 세대를 뛰어넘으려면, 개성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