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번쯤 죽음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것이다..
저승이 있는지.영혼이 있는지...윤회를 믿어야할지.. 따지고 보면 나와 같은 DNA를 가지고 2세..3세 가 태어나면 나는 영원히 또 다른 몸에서 살아가는게 아닌가.. 이런 생각까지 하며 말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진정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뭘까...
존재의 사라짐... 그 소멸에 있는것일까... 무한지옥 타르타로스에 떨어지는 공포 때문인가
어쩌면... 죽음 자체의 두려움보다는 날 기억해줄 살아남은 사람들의 인식 때문은 아닌지...
어짜피 죽음으로 가기위한 삶이니까 잘죽기위해 열심히 살아가야한다면 너무 아이러니한가...
여기에 올려진 죽음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천진한 소녀가 해골을 포옹하고있는 그로테스크한 뭉크의 <죽음과 소녀>라는 작품이 있는데 삶이란 죽음을 깨안으면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는 역설적인 표현이라도 하는듯하다 물론 죽음을 감수하는 소녀의 사랑. 열렬한 사랑은 때론 죽음을 동반한다는 작가의 의도가 숨어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에곤쉴러의 동명의 작품은 또 어떠한가 늙은이를 껴안고 있는 소녀(처녀)
죽음을 받아들이는 노인.. 보내지 않으려 끌어안는 소녀.. 물론, 쉴러의 끝난 사랑과 그 사랑을 끝까지 잡아보려는 처녀의 모습이 그려진건지도 .. 두 작품 다 죽음보다 더 깊은 삶과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것으로 보여지는데 어쨌던.. 시작과 소멸은 늘 함께하는것이 아닐까?...
흐르고 있는 음악 역시 슈베르트의 현악4중주<죽음과 소녀>이다 클라우디우스의 시에 의해 1817가곡<죽음과 소녀>를 작곡 7년뒤 현악4중주14번을 작곡하는데 2악장에 이 가곡의 주제를 사용하여 제목을 그리 붙였다 소녀의 해맑은 미소도 보이고 그 앞에 죽음의 쓸쓸한 눈물도 보인다 무거우면서도 아름답다... 죽음이 안식일지도 모른다는 그의 의식이 느껴진다..
'죽음과소녀....' 전혀어울릴것 같지 않는 두단어가.. 예술가들에겐 어떤 의미로 관계지어 진건가....
그림....에곤쉴러 <죽음과소녀(처녀)> 음악...슈베르트 현악4중주 NO14 2악장<죽음과소녀>
<옮겨온 글>
| |